영산신씨
 
 
 
 
 
辛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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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溪 寧越辛公(達廷) 墓碣銘

昔先王之制喪禮也 極仁情 盡天理 惟哀慽 是主 而復爲之敎曰 毁幾滅性 其至於滅性者 至謂之非孝 盖聖人之隆孝道也 旣如此重人命也 又如此雖然 人之血氣虛實不同 而疾病之來 或不由人 則孝子之損生者 豈可盡以滅性疑之耶 亦觀其所處如何耳 寧越辛公 諱達廷 字通之 母喪 廬於墓側 哀毁成疾 其大人親至廬所 舁來救藥 僅以得蘇 其後 又遭父喪 疾復作 未踰朔 而身沒 夫親喪固所自盡也 公兩遭荼毒一於哀而巳 而前後之病 或救 或不救 豈人之所得爲哉天也 而摎其情事 則有無涯之悲痛焉 嗚呼 公非孝又當誰爲孝耶 公鼻祖 諱毗 高麗太中大夫司營尹 尹生知門下贊成事琚 贊成生典法判書文貞公唐係 文貞生判圖判書云佐 判書生掌令僩 掌令生司醖署直長帶犀 直長生長城縣監寶重 縣監生箕子殿參奉守 參奉娶典牲令琴公以簡女 以成化癸卯生公於咸昌猪谷里 公禀性戇直不苟隨俗不作忮害於人好善惡惡出於素誠其事親色養無違以母夫人允嬰沈疾公侍湯藥未嘗離側不解衣帶不應科目特爲參奉公 所感燐則公之篤於孝親 自其平日已可見矣 公配殷豊申氏 高麗殷山伯仲佺之後 曾祖賁承文院著作 祖應之掌隷院司議 考瑗進士 外祖慶州崔鎭承文院校理 申氏生於成化甲辰 性静而愼淑 宜家睦族 婦道甚得 生一男曰壽童 娶司書朴鵬鱗女 二女長適朱世興 季適黃士元 皆儒士 公歿時年四十有二 嘉靖甲申二月二十二日也 申氏寡居三十餘年 以慈儉持家 不墜素業 撫養孤幼 至于成立婚嫁以時 推餘力以及於窮親 其亦賢矣哉 乙卯二月二十三日 申氏 年七十二而終 是年十二月十二日 葬于龍宮縣東於召山 於是嗣子某 以爲公之葬 子女皆幼 未備禮且盧其地濕 越七年辛酉十二月十五日奉遷 與申氏同原 而葬焉 吾甥弘祚 卽公之同姓族侄 以賢嗣之懇來請 銘 三反而不已 因聞賢嗣亦勤於持喪 滉烏得而終辭 銘曰 有挺辛公 有淑其匹 孝以捐生 貞以遂節 兩美雙痙 黃泉白璧永錫祚胤 不匱孝則 斲玆珉石 表厥先德 我則銘之 用勸衰俗

嘉靖四十五年二月 日 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 李滉 撰

礪城君 宋 寅 書

玉溪公 墓碣名(위의 해석본)

옛 선왕이 상례를 제정함에 있어 인정을 다하고 천리를 다하되 오직 애척을 주로 한다고 하였고 다시 가르치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하여 거의 멸성하다 가 끝내 멸성친상을 당하여 지나친 슬픔으로 자기의 성명을 잃은 자가 효가 아니라고 이르니 대개 성인의 효도를 높임이 이와 같고 인명을 중히 여김에 이와 같다. 그러나 사람의 혈기가 같지 않고 질병의 옴이 혹 말미암지 않은 즉 효자의 연생이 어찌 멸성으로 의심할 것인가, 또한 소처를 보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영월신공 휘 당정 자 통지 모상에 묘 곁에 여막 짓고 애회해서 질병을 얻었거늘 그 대인이 친히 여소에 가서 들것으로 데려와서 구약하여 소생케 하였더니 그 뒤 또 부상을 당함에 병이 다시 나서 삭일을 넘지 않고 별세하니 무릇 친상은 진실로 자진할 바라 공이 두 번 도독어려움을 만남에 한 결같이 슬퍼했을 뿐이다. 전후의 병이 혹 구하기도 하였고 혹 구치 못한 것은 어찌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늘인데 그 정사를 묶어보면 끝없는 비통이 있는 것이다. 슬프다 공이 효가 아니고 또 누 구가 효가 되리오. 공의 선조희비는 태중대부사 영윤이고 그는 지문하찬성 사거를 낳았고 그는 판도판서 문좌를 낳았고 그는 장령 간을 낳았고 그는 사온서직장 대서를 낳았고 그는 장성현감 보중을 낳았고 그는 기자전참봉 수를 낳았다. 참봉은 전생령 금이간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성화계묘년에 함창 못골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이 품성이 당직한 편으로 구차스럽게 시속에 따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어버이 섬기기 한 결 같이 그릇됨이 없었다. 모부인이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있었을 때는 탕약을 드리면서 옆에서 떠나지 않았고 의대를 풀지 않았으며 과거에 응하지 않음이 참봉공의 가엽이 여김이었으나 공의 평소효성이 지극함을 짐작이 가는 일이다. 공은 은풍신씨와 배필 하였는데 은산백중전의 후손으로 증조휘분은 승문원저작이고 조부용지는 장예원사의이고 고희원은 진사이다. 외조부는 경주진이니 승무원교리를 지냈다. 신씨는 성화갑진년에 낫다. 성품이 조용하고 깨끗하며 가정에서나 친족사이에 화목하면서 격도를 잃지 않았다. 일남이 있으니 수동인데 사서 박붕인의 따님에 장가들었고 이녀를 두었는데 주세흥 및 황사원과 결혼했으니 모두 유가의 선비들이다. 공이 돌아 갈 때는 42세로서 가정갑신 222일이다. 신씨는 과거 삼십 여년에 자애와 검소로써 가정을 다스리되 본업을 지키고 외롭고 어린 것을 부양해왔다. 성립함에 이르러 때를 맞추어 혼가를 시켰고 여력이 있으면 가난한 친척들을 도와주었으니 그 또한 어질다 하겠다. 을묘 222일 신씨는 72세로 종하여 이해212일에 용궁현동쪽 어소산에다 장사지냈다. 이에 사자모는 공의 장사때 자녀들이 모두 어려서 예를 갖추지 못했고 또 그 장지가 습함을 염려하여 7년 후인 신유년 1215일에 신씨와 동원에 옮겨서 장사 지냈다. 나의 생질홍조는 곧 공의 동성족질이라 현사에 정성으로 같이와서 비명을 청함에 세 번이나 반대했으나 듣지 않고 또 듣기에 현사도 지상에 열성이 있다기에 항이 어찌 끝내 사양할 수 있으리오. 명해 가로되 빼어난 신공으로 현숙한 배필이 로다. 효로서 목숨을 버리고 정으로서 절개를 이루었다. 두 미덕쌍무덤 황천의 흰 구슬이다. 복된 아들을 두어 효칙을 잘 지키도다. 이 민 석을 세워 선덕을 드러냄에 명을 지어 쇠 속에게 본보기를 권하노라.

 

가정 사십오년이월 자현대부동지중추부사 이 황 지음

여성군 송인(宋寅)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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