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씨인물
#사진자료 1~5 松巖集 / 6 獨樂八曲 내용 中
#송암松巖_권호문權好文(1532 ~ 1587) : 일죽재 신내옥과 벗이며 아들 신홍립의 스승이다.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신내옥은 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남면 월휴리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안동 서쪽의 거진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낙양촌洛陽村(현 안동시 수하동)으로 이주하였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문 중 류운룡柳雲龍, 권호문權好文 등과 가까이 지냈다. 출사하지 않고 도학 공부에 전념하여 마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경광서당鏡光書堂 을 지어 마을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차남 의립은 인목대비와의 친분 덕에 인조반정 때 집안이 몰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여파인지 안동에는 잘 사는 신씨가 찾아보기 힘들며 판서공파의 종손어른을 뵌 적이 있는데, 국학진흥원에서 근무하기도 하셨고, 첨엔 풍산 농협공판장에 임원이셨을 때 뵈었다,
항렬을 따지면 내가 아지매(안동 표준어:숙모) 였기 때문에 나보다 훨 연배가 있으신데 나만 보면 아지매라고 하셨었다. 신씨는 대대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기가 센 편이고, 성격이 대쪽같아서 부조리함을 못 참는 편이고, 문중 큰 제사에가서 뵈니 시인, 소설가, 가수 등 예능게열이 많으셨고, 그외 교수님 변호사도 계셨지만, 전체적으로 풍류를 즐기는 한량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
그래서 내 성격이 어느 정도 유전자로 흐르는 집안 내력이지 않나 싶다.
제주는 양조장에 주문한 울금주를 쓰고 스피커로 제례음악을 틀고 진행한다. 묘제와 산신제를 겸하고 화봉재사에에 내려와서는 총23분의 조상님의 위패를 올려 놓고(가운데에 시조공 신자辛字 경鏡의 위패를 가장 큰 사이즈로 올려 둔다.)
병풍으로는 성학십도 필사본을 두르고 진행한다.(성학십도의 원본은 필사본이 아니라 판본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니 인사동이나 집안의 필사본은 원본은 아닌 셈.)
포항 기계에 가까이 살았던 문화 류씨가 4대조 몽상 할아버지 묘소의 지석을 뽑아 논에 버린 후 자신들의 조상묘를 첨묘를 했다. 후에 그 가문의 제보로 묘지 지석을 찾아 지석의 기록대로 원래 자리에 찾아갔고, 1900년대 초반 법정 싸움을 한 후 되찾았다.
1대조~3대조 묘소는 #북한의_서화담리 라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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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_신홍립 보충
자는 공원公遠. 호는 추애秋厓.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충순위忠順衛 남구수南龜壽의 딸이다.
성품이 인후하고 문장을 좋아하여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류운용柳雲龍 · 권호문權好文에게서 사사하여 그 연원淵源을 이어받았다. 1612년(광해군 3)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_弘文館校理 를 거쳐서 #춘추관기사관_春秋館記事官 이 되고
외임으로 무안務安·용인龍仁의 수守를 역임하였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훈家訓을 전수하며, 김용金涌·김집金集·김응조金應祖 등 동문同門 40여 명과 회합해 스승인 권호문선생을 재사하면서 제문을 작성하는 등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다하였다. 저서로는 #추애유집秋厓遺集 이 있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충주교수忠州敎授 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사·북청판관을 거쳐 양산군수·풍기군수·호조정랑·함양군수·청도군수 등을 지냈다. #서장관으로_연경에_다녀온_뒤 에는 1618년(광해군 10) #공조참의 를 지냈으며, 이어 #형조참의·#병조참의·김해부사·대구부사·철산부사를 거쳐서 1622년 #동부승지 로서 #접반사 를 겸하여 #부호군 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