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영산영월신씨靈山寧越辛氏 선계론

靈山寧越辛氏 시조 辛鏡신경 

號호는 巖谷암곡 諡號시호는 貞懿정의 또는 廷議정의, 

中國중국 宋송나라 太觀태관 元年원년 高麗고려 睿宗예종 2년 1107년 丁亥生정해생

 

始祖시조이신 公공은 本是본시 中國중국 땅 롱산인隴山人으로 夏하나라 2대 啓王계왕의 支子지자로써 莘신이며,

(4108년전 중국의 夏하나라 제2대 계왕啓王 제로고신왕帝盧高莘王이 아들 4형제를 두어 장남은 伊이요, 차남은 鎭진이요, 3남은 秀수요, 4남은 仲중이라, 장남 伊이는 高고씨로 성하고, 차남 鎭진은 莘신씨로, 3남 秀수는 柴시씨로, 끝에 仲중은 奏주씨로 각각 득성하였다. 계왕이 분봉시 차남 鎭진에게 그 성을 莘氏신씨로 創性창성하였으며, 그 후손이 중국 농서성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寧主영주는 甘肅城감숙성이 속현이며 隴山농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농서隴西라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일부지방(동남아지역등)에서 莘신을 그대로 쓰고있는 사람도 간혹있다고 한다. 4형제 모두가 중국에서 당시 대성이요 왕자였다. )

그후 子孫자손이 草초를 떼어 버려 辛氏신씨로 된 것이다. 하였으니 中國중국의 王孫왕손이며,

高麗고려 중엽 中國중국의 北宋북송때 當代당대 8성(張, 洪, 河, 郭, 慶, 李, 辛, 池)이 義兄弟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거울 鏡경자로 같이하여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는 이른바 8學士학사, 鏡公 8경공의 한사람으로 전한다.

宋송나라 高宗고종 8년 庚戌경술(1130)에 侍郞시랑(황제 호위관)으로써 高麗國고려국에 入國입국하였고, 그 후 8경공 中중에 李, 張, 河, 洪 4경공은 임무를 마치고 中國중국으로 歸國귀국하시고, 慶, 池, 郭, 辛 4경공은 오늘날 4성씨의 始祖시조가 되신다. 시조공께서는 우리나라의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奉職봉직하였다.

 

※ 隴山농산_陝西省隴縣섬서성 농현 서북에 있는 산. 앵무새의 서식지로 유명하며, 앵무새를 ‘隴客농객’이라고도 함.


隴山鸚鵡能言語 爲報家人數寄書
농산앵무능언어 위보가인수기서
농산의 앵무새 능히 말을 하나니, 고향집에 부치는 몇 마디 글월 알려줄 수 있으려나.


岑參잠삼 赴北庭度隴思家부북정도농사가
 

牢鏁玉籠無計出 隴山歸夢漸蹉跎
뇌쇄옥롱무계출 농산귀몽점차타
옥 둥우리에 갇혀 빠져날 길 없으니, 농산에 돌아갈 꿈 점점 아득하구나.         - 이규보李奎報의 앵무鸚鵡 

 

高麗고려 11대 仁宗인종 16년 戊午무오(1138)에 及第급제하여 벼슬에 나서서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의 官職관직에 올랐다.

大唐時 奉使來 新羅仍留官 披斯樂而名傳 本 中國 隴山人云 (대당시 봉사래 신라잉류관 피사락이명전 본 중국 농산인운)

始祖公시조공이 中國중국에서 건너올 당시 平壤평양 大洞江대동강 상 連廣亭연광정에서 큰 연희를 베풀었는데 共作臺공작대를 八鏡臺팔경대라 하고, 그곳에서 지었다는 유시(遺詩)가 傳전한다.


有溪無石 溪還野 有石無溪 石不奇 此地有溪 兼有石 天爲造化 我爲時
물이 있고, 돌이 없으면 물은 의미없는 돌과 같고,
돌이 있으되 물이 없으면 그 돌의 모양이 기이하지 않는 법인데,
이곳은 물과 돌이 함께 있어 하늘은 조화를 이루어, 내 詩시를 짓노라.

 

옛날영산면영축산.jpg   영산靈山 관觀 

     향사鄕史의 전래傳來에 依의하면, 시조始祖 신경辛鏡 公은  자신이 살던 중국

     강서성江西省 대유현大庾縣 동북東北 60里리에 있는 천축산天竺山과 산세가

     비슷한 至今지금의 경남 창녕군 靈山郡.縣영산면에 있는 진산鎭山인 영축산

     靈鷲山 아래에 이르러 터를 잡고 이곳이 후손들이 모여 가히 살만한 땅이라

     하여 신씨辛氏의 세거지지世居之地가 되었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또한

     함께 입곡入哭하신 곽경郭鏡 公께서는 영산靈山, 창녕昌寧의 이웃고을인 현풍

     玄風의 포산包山(비슬산) 아래에 터를 잡고 본관을 포산包山이라 정관定貫 하였

     다고 한다. 영산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지명. 본래 신라의 서화현인데 경덕왕이

     상약으로 고쳐서 밀성군(밀양)의 영현으로삼았고, 고려 때 영산으로 개칭하여 감무를

     두었다가 조선 초에 縣監현감을 설치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3년에 군을 폐하여 길곡면 사촌리는 함안군

     에 병합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녕군에 병합하여 영산면이 되었다.

 

영월寧越 관觀

신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나라 사람 신시랑과 엄시랑(영월 엄씨의 시조로 엄임의라고 한다)이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사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영월(寧越)은 본래 고구려의 내생현으로 신라 때는 내성현이었고 고려 때 영월로 고치면서 원주에 속하다가 공민왕 때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조에는 그대로 영월군으로 하다가 숙종 무인년에 장능을 추봉하면서 진을 설치하여 도호부사를 두다 별칭으로는 내생 내성 영성 금성 영천 영평이 있다

그러나 이름과 후대를 알수가 없어서 고려 인종때 금자광록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던 신경辛鏡(시호는 정의)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은 중간에 영산, 영월로 분관이 되었는데 최근에 발견한 신경의 4세손인 신몽삼의 묘비에 "태사공영주신지묘"라고 되어 있어 그 시대는 분관이전이었슴을 알수있다. 

 

화봉제사2013.JPG   화봉제와 축산제

     경북 영일군 기계면 화봉동의 화봉재사禾峯齋舍는 1940년 경진庚辰에 후손

    신영승辛泳升(상장군공파)씨가 발기주동發起主動이 되어 원래 흥해현興海縣

    객관客館이던 망진루望辰樓 건물을 불하拂下 받아 그해 음력 1월 14일 건물을

    상량上樑하고 그후 단기4297년 갑진甲辰 서기1964년에 화봉재禾峯齋와 숙연사

    肅然祠를 건립建立하여, 문의 이름을 경호敬乎라 칭稱하고 위패位牌를 봉안

    奉安하였는데, 후손 신진수辛鎭洙가 비를 세우고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여강驪江 이채원李綵源이 찬명撰銘하고, 후손後孫 신복교辛福敎가 기문記文

    병서幷書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단기檀記 4298년

    을사 乙巳(1965년)에 후손 신동식辛東植(상장군공파)과 영산거주靈山居住 종인

    등이 발의發議하여,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에 영격사詠格祠를 건립建立하였다

     

 

2世 辛雲敏신운민 官관 左贊相좌찬상, 2世 손 ----- 始祖시조 1세 貞懿公정의공 鏡경의 아들이다.
高麗고려 仁宗인종 7년 단기3462년 己酉生기유생(1129년)이다. 高麗고려 毅宗의종 6년 壬申임신(서기1152년)에 及第급제하여 官관이 寶文閣보문각 大提學대제학 修文殿學士수문전학사 左贊相좌찬상에 올랐다.
檀記단기 4303년 庚戌경술(서기 1970년)에 靈山영산 詠格祠영격사에 始祖公시조공과 同一동일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여, 매년 음력 9월1일에 享祀향사를 지내왔다. 2016년 이후에는 화봉의 숙연사에서 매년 양력 5월 5일에 시조공, 2세 운민 祖, 3세 영계 祖 세분의 향사를 지낸다 

 

3世 辛永繼신영계 3世 손 -----始祖시조 1세 貞懿公정의공 鏡경의 손자이다.

高麗고려 懿宗의종 무진戊辰生 (1148년). 명종갑오 급제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 

檀記단기 4303년 庚戌경술(서기 1970년)에 靈山영산 詠格祠영격사에 始祖公시조공과 同一동일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여, 매년 음력 9월1일에 享祀향사를 지내왔다. 2016년 이후에는 화봉의 숙연사에서 매년 양력 5월 5일에 시조공, 2세 운민 祖, 3세 영계 祖 세분의 향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