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용효 (30世) 상장군공파 대종회 부회장, 운영위원>

문무겸전 신초辛礎,임란 때 곽재우와 더불어 의병활동

-임진왜란 때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신초辛礎 1568(선조 1)~1637(인조 15)의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우수友叟, 호는 문암聞巖, 부친은 현감 희수希壽이다. 필자의 12대조이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문재文才와 무재武才를 겸비한 기린아麒麟兒였다. 당시 나라는 크고 작은 외침으로 인해 국운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민民은 가난과 과중한 징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이렇게 열악한 주변의 환경에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그의 정신 세계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지배하고 있었다.

청빈한 목민관으로 소문난 부친의 엄격한 가정교육도 그가 진충보국하는 국가관을 확립하게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1583(선조 16)년 이탕개尼蕩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출사出仕에서 급제를 거치면서 종4품직에 오른 것이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군軍과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공위겸孔威謙이 적에게 투항하고 부역하여 영산에 웅거하면서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신초 장군은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하여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 전투에서도 크게 공을 세우니 곽재우의 간곡한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었다. 그는 현감으로서도 백성을 위무하고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1772(영조英祖 48)년 10월 28일에 장령 신이복愼爾復이 올린 상소문에는 그의 명성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입증하고 있다.

 “고故 군수郡守 신臣 신초辛礎는 … 위대한 공렬孔裂이 실로 충익공忠翼公 신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같은 공으로 같은 지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유독 증시贈諡·증직贈職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서운하게 여깁니다. 

신초는 김해가 포위되어 궤멸될 때에도 왕산旺山에다 책柵을 설치하고 말에 뛰어 올라 도강渡江하여 계책을 세워 적을 포박했으니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일의 사적事蹟이 방책方冊에 밝게 실려있어 신이 감히 낱낱이 번거롭게 진달하지 못하나 대저 그 충분의열忠奮毅烈은 아직도 교령嶠嶺밖에 늠름하게 남아 있습니다. 영남우도嶺南右道가 그때에 보존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이니, 증휼拯恤하는 은전을 마땅히 곽재우와 더불어 고르게 대우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증시 증직이 이사람에게 미치지 않은 것을 누군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영조실록』119권, 48년(1772) 10월 28일)

신이복의 상소문을 일별해 보면 신초의 활약상이 곽재우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증시 증직이 없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후 보성군수를 역임하였다. 1637년 별세한 후 1910년 순종 때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왕이 내린 조서에서“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재능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선비로 되었고, 무공武功 또한 길이 표창할 만 하다.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라”하였다.

신초, 과연 그는 문무를 겸비한 명장이며,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우리 신씨의 사표이며 표상이었다. 창녕의 문암정聞巖亭과 영산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공이 노년에 머물던 계성 문암정에 전해오는 공의 영정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도천 염수재 가묘家廟에서는 공의 종손과 직계 후손들이 양兩 명절에 불천위제사를 모시고 있다. 후손들의 숭모정신이 크게 돋보인다. 저서로는《문암집》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문암집》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9 9세 4파조 덕재공 신천, 초당공 신혁, 부원군 신온, 판서공 신한 대종회 2021.04.14 71
48 상장군공 후손 6세 순현 - 7세극규 - 8세 공근 -9세 성열 公 대종회 2021.04.11 36
47 문종공 후손 6세 백련 백한 7세 시어사공 희 8세 지화 9세 천, 혁, 온, 한 대종회 2021.04.11 22
46 5世 長子 覺繼각계, 2子 千繼 3子 縣繼 4子 周繼주계 대종회 2021.04.11 25
45 시조공 신경辛鏡, 2世 운민雲敏, 3世 영계永繼, 4世 몽삼夢森(태사太師) 대종회 2021.04.09 56
44 13세 신숙양(辛淑良) 증贈 한성판윤(漢城判尹, 정_2품)/ 부원군파 file 대종회 2021.02.07 75
43 제12세 신극례(辛克禮)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 領議政, 정_1품) file 대종회 2021.02.04 79
42 15世 신숙거(辛叔琚), 16世 신윤문(辛允文)-부원군파 file 대종회 2021.02.02 71
41 제13世 신인손(辛引孫) 형조판서 초당공 신혁 祖의 4대 孫 file 원근(33세) 2021.01.30 62
40 20世 신경辛暻 -덕재공파 양평문중 file 원근(33세) 2021.01.30 80
39 제 4 世 신몽삼(辛夢森) 태사(太師) 공 file 원근(33세) 2021.01.30 73
38 제10세 신중석(辛仲碩) 문하시중(門下侍中_정1품) 원근(33세) 2021.01.30 60
37 직언直言과 직간直諫의 충신 신극례辛克禮 file 원근(33세) 2021.01.23 49
36 신석조辛碩祖, 정치의 요체는‘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원근(33세) 2021.01.23 50
35 경복궁 창건의 주역 한성판윤漢城判尹 신극온辛克溫 원근(33세) 2021.01.23 56
34 조선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몽삼辛夢參-22世 상장군공파 원근(33세) 2021.01.23 49
» 신초辛礎 1568(선조 1)~1637(인조 15) 원근(33세) 2021.01.23 34
32 신정보辛鼎保 - 거제도 입향조 원근(33세) 2021.01.23 38
31 신석환辛碩丸- 무오사화 때 고위직 도총관을 버리고 은둔하다 원근(33세) 2021.01.23 67
30 인산仁山 신공제辛公濟 -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목 신원근(33세) 2021.01.23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