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씨인물 | http://신응경 - 영원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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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景之 號梅隱 成宗癸巳1473生 中宗朝寧遠郡守 錄靖國原從勳以淸直見臨權奸知士禍將作隱于嘉林山水自娛好學不倦有狀錄墓扶餘忠化面 福金里 粉土洞癸坐有碣 配淑夫人文化柳氏府使希轍 女
청사에 빛나는 효행의 표상 영원군수 신응경辛應卿
천자영민天姿英敏하고 재예才藝가 출중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영원군수寧遠郡守 신응경辛應卿은 시조 경鏡으로부터 16世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公은 조선 성종 계사癸巳년에 전라도 임피군臨陂郡 동이면東二面 흥법리興法里 효림동孝林洞에서 태어났다.
부친 휘 백수伯粹는 개성군과 고부군의 군수를 지낸 지방 수령 출신이고 모친 숙부인淑夫人은 파평윤씨로 군수를 역임하신 윤혜尹惠의 따님이다. 공의 유허비명遺墟碑銘에 의하면‘公은 유년기부터 천자영민天姿英敏하고 재예才藝가 출중하였다’라고 적어놓았다.
소년기에는 효성이 남달리 뛰어나 부모님 먼저 음식을 손대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한다. 반드시 부모님께 공양供養 한 다음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맨끝에 자기가 음식물을 취하였는 바 공의 효제孝悌 실천은 당대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출천지대효出天之大孝를 실천
공은 출천지대효出天之大孝의 전형典型 이었다. 성년 이후 양친 임종후 시묘侍墓 6년을 하루같이 아침 저녁 호곡呼哭에 지성을 다하였다. 공의 시묘 효행은 이웃마을 은 물론 경향 각처에 널리 소문이 퍼져나가 그 동명을 효림동이라 칭하였다하니 공의 효행은 역사에 길이 빛날 가문의 영광이었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세게적 역사가歷史家 아놀드 토인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약 지구가 멸망해 다른 별로 간다면 한
국의 효孝와 경로사상敬老思想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세계인이 본받을 효자일 뿐만 아니라 천성이 온후강직하여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일상 생활이 청렴결백하여 세상의 부귀공명을 뜬구름같이 여기고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삶의 철학으로 삼았다. 일찍이 송당松堂 박영지朴英之 문하에 사사하시어 학문을 닦으셨다. 당대석학 거유이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선생과의 두터운 교분을 쌓고, 이청李
淸 감사와도 학문적 교류가 많아 문장과 도덕이 탁월하여 국내 많은 명적名蹟을 남기니 록綠이 정국원종공훈에 이르렀다.
공은 모든 덕목을 갖춘 재사였지만 시운에 맞지않아 대임大任에는 부름을 받지않았지만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듯이 벼슬을 내려놓고 부여 충화忠化로 은일隱逸하셨다. 충화에 온후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시고 만년에는 요산요수로 유유자적하시며 음풍영월로 여생을 보냈다.
공의 생전에 많이 남긴 유묵 유훈은 잦은 전쟁과 병화로 현존하는 문헌 잔적殘積이 소수라 그 애통함을 이루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천고에 빛나는 공의 효도 정신은 날이 갈수록 퇴색되어 가는 현실을 볼 때 너무나 통탄할 뿐이다.
공의 13세손 장선章善씨가 유허비 건립
마침 공의 13세손 장선章善씨가 공의 유지를 계승하여 가문의 명예를 선양하고 자손만대 영화의 터전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거액을 헌성하여 자손 누대의 위선사업으로 공의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에서는 효孝, 나라에는 충忠을 다함이 고금의 진리요.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논어論語≫에“신종추원愼終追遠 민덕귀후의民德歸厚矣”라 하였으니, 신종’이란 상喪에 그 예를 다하는 것이고, ‘추원’이란 제사에 그 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백성의 덕이 두터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백성이 감화되어 그 덕 또한 두터움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대개 부모의 임종은 사람들이 소홀하기 쉬운 바이지만 능히 신중히 할 수
있고, 부모의 혼령이란 사람 들이 잊기 쉬운 바 이지만 능히 추모할 수 있으면 그것이 두터워지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스스로 행하면 자신의 덕이 두터워지고, 백성도 감화되어 그 덕 또한 두터움으로 돌아간다.
위선사업에 정성을 다한 후손들이 만세 번창함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입비立碑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정성을 다하신 장선씨의 후손에게도 길이길이 영광을 누릴지어다
어디까지 진실인지... 얼마나 빛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