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씨인물 | http://신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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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공민계사)∼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자는 득지(得止)이다. 광탄면 신산리에 묘가 있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사람인데,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의 아들이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어, 남의 실수를 보고는 용납할 줄을 모르고 반드시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한 집안 사람이 궁핍(窮乏)함을 알리면 안색을 엄정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씩 먹는다고 속언(俗諺)에 말하지 않았는가. 걸인이 죽어도 남는 옷은 있다고 하니,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정용 호군(精勇護軍)에 이르렀다.
병인년에 충청도 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을 따라 왜구를 쳤는데, 승원(承源)이 전진하기를 주저하니, 유정이 칼을 빼어 승원이 탄 말을 겨누면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원수(元帥)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으니, 국가에서 장수를 보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싸워야 합니다." 하니, 승원이 분격(奮激)하여 적과 싸워서 크게 이겼다.
또 남원(南原)의 싸움에서는 유정이 혼자서 말을 타고 적을 추격하다가 말이 넘어졌다. 그때 왜적이 유정의 배 위에 걸터앉아서 칼을 빼어 찌르려고 하니, 유정이 왜적의 불알을 움켜잡고 몸을 뒤쳐서 칼을 빼앗아 도로 찔렀다. 승원을 따라다닌 지 4, 5년 동안에 적과 싸운 것이 25번이나 되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니, 유정의 공이 많았으므로 용감하다고 이름이 났다.
그 후 병조 의랑으로 옮겼고, 정축년에 국가에서 각도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15진(鎭)의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을 때에 지혜와 용맹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제수(除授)하게 되었는데, 유정이 맨 먼저 선발되어 이산진(伊山鎭) 첨절제사가 되었다. 무인년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가 9월에 파직되었다.
황엄이 강을 건널 때 객관(客館)에 깔 자리를 빼앗아 사물을 싸는 자가 있으므로, 유정이 장사(壯士)를 시켜 주먹질을 하니, 그 사람이 울면서 황엄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유정이 황엄의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유를 상세히 알리니, 황엄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도 무례한가." 하니, 유정이 관대(冠帶)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소방(小邦)에 의관(衣冠)을 내리시어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였는데, 지금 관인 등이 변경을 침요하여 멋대로 놀아나니, 이제는 의관과 예의로써 그들을 대우할 수 없습니다.
먼저 관인을 죽인 후에 내가 관인이 범한 것을 글로 써서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도 죽겠습니다." 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급히 장사(壯士)를 불러 말하기를,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오라. 먼저 한 사람의 머리를 베고 강을 건너가겠다." 하니, 황엄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드디어 울면서 호소한 사람을 매질하고는 술을 놓고 즐기다가 작별하며 말하기를, "변장(邊將)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될 것이다." 하였다.
경인년 봄에 야인이 경원(慶源)을 침범하여 병마사 한흥부(韓興富)를 죽이니, 국가에서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을 보내어 도원수를 삼고, 유정을 발탁하여 좌군 도총제로 임명하여 부장(副將)으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11월에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옮겼다가 임진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갑오년에 평안도 도안무사가 되었다가 을미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고, 한가로이 있은 지 10여 년 만에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 74세이었다.
부의(賻儀)를 내리고 무절(武節)이란 시호를 내리니, 강강(剛强)하고 곧게 다스림을 무(武)라 하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함을 절(節)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