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元天錫의《운곡시사耘谷詩史》서문에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이
신돈辛旽 의 억울한 누명 상세히 밝혀…
운곡시사 내용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의 서문
운곡행록시사서(耘谷行錄詩史序)
내 일찍이, 원주 사람 원천석(元天錫)이 고려 말에 숨어살면서 책을 써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신돈(辛旽)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는데, 우리 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니,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는 포은(圃隱)과 야은(冶隱) 등 여러 선생과 비교할 만하지만, 자손들이 그 책을 숨겨둔 지 오래 되어 읽어 본 사람이 없고, 그 이름조차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200년 뒤에 내가 이 고을에 관찰사로 왔다가 마침 선생이 지으신 운곡시집(耘谷詩集)을 얻어 보니, 비록 기록한 것이 많지는 않아도 예전에 들었던 사실과 달라서, 모두 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아아! 우왕(禑王)이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적에 최도통(崔都統 : 최영), 목은(牧隱), 포은(圃隱) 같은 몇몇 원로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당시에는(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어서 즉위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이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목은(牧隱)이 먼저 말하기를,“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런데 창왕(昌王)을 폐위 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우왕(禑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창왕을 폐위시킬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이것으로써 구실을 삼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王氏)의 후손은 이미 공민왕(恭愍王) 뒤에 끊어진 셈이니, 몇몇 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정충(精忠) 대절(大節)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죽고 말았는가. 하물며 당시에는 조정의 기강이 그다지 문란하지 않고 군국(軍國)의 큰 정사도 몇몇 분들에게 일임되어 있었으니, (그분들이) 거짓 임금을 쫓아내고 나라 왕실의 성(姓)을 존속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설 분들이 아니었던가. 그분들이 취할 태도는 이미 마음속에 강구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를 쓰는 저 무리들도 일찍이 왕씨(王氏)의 국록을 먹은 자들이건만 죽음으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왕(禑王) 부자를 신돈(辛旽)의 출생으로 덮어씌웠으며, 그것도 모자라 공민왕이 병풍 뒤에서 홍륜(洪倫) 등의 외설스런 짓을 보았다고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읽는 자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다. 우왕의 한 가지사실만 근거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니,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선생의 한 마디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천백년 뒤까지도 반드시 그릇된 기록을 답습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나라에 역사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나라에 유익함이 바로 이와 같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이 조정에 계셨기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난뒤에도 (고려왕조가) 수십 년 동안이나 부지할 수 있었다. 선생같이 재야에 숨어 계시는 분이 시를 읊고 회포를 서술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 썼으니, 말씀 한 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의 글로 인해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부자(父子)로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고려사’가운데 어지러운 말과 망녕된 글들도 이로 말미암아 변증할 여지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궁하게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한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시의 임금들이 일찍이 충(忠)과 사(邪)를 판단해 처음부터 끝까지 국정을 위임하고 그 경륜을 펼치게 했더라면 목은과 포은(圃隱)이 어찌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같이 (죽게)되었겠으며, 지초(芝草)
를 먹고 국화를 먹는 것도 어찌 선생이 좋아서 스스로 택했으랴. 슬픈 일이로다. 선생의 시고(詩稿) 2권은 모두 선생이 스스로 쓰신 것이고, 대부분 산인(山人)이나 석자(釋子)들과 오가며 주고받은 것인데, 그 가운데 약간은 바로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라서 빨리 세상에 널리 퍼뜨려 표식(標式)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곧 베껴내어 한 책으로 만들고, 연대순으로 편집하여 제목을‘시사(詩史)’
라고 하였다. 풍속을 살펴보려는 자들이 보지 않으면 안될 책이니, 붓을 잡는 자들이 (이 책에서)채집할 수 있도록 대비해 둔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여름.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은 삼가쓰다.
별로 억울할 것도 없읍니다. 행동 처신을 잘 했으면 죽어서 누명을 쓸일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