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유적지순례

영산신씨 양세이효일열비
(靈山辛氏兩世二孝一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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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신씨 신세린(辛世麟), 신세린의 처 강릉김씨,
신세린의 아들 신붕(辛鵬)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효열각.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江陵의 歷史와 文化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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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17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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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세린(孝子 成均進士 恭陵參奉 靈山辛公 諱世麟)
처 열부 강릉김씨지려 (妻 烈婦 江陵金氏之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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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효자 영산신공 휘붕지려
(孝子) 靈山辛公 諱鵬之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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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경위

> 영산신씨 집안에서 조상의 효행과 절의를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형태]

비각에는 2개의 비가 있으며 1기는 부모인 '효자 성균진사 공릉참봉 영산신공
휘세린(孝子 成均進士 恭陵參奉 靈山辛公 諱世麟) 처 열부 강릉김씨지려
(妻 烈婦 江陵金氏之閭)'의 비석은 받침돌 위에 높이 120㎝, 너비 41㎝, 두께 17㎝인 몸돌을 세웠다.

다른 1기는 아들인 '효자 영산신공 휘붕지려(孝子 靈山辛公 諱鵬之閭)'의 비석은 받침돌 위에 높이 100㎝,
너비 44㎝, 두께 17㎝인 몸돌을 세웠다.
 

[금석문]

과거에는 세 개의 비석이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기면서 비석의 앞면 제목이 '효자 영산신공 휘붕지려
(孝子 靈山辛公 諱鵬之閭)'와 '효자 성균진사 공릉참봉 영산신공 휘세린(孝子 成均進士 恭陵參奉 靈山辛公 諱世麟)
처 열부 강릉김씨지려(妻 烈婦 江陵金氏之閭)'인 두 개만 있다. 신세린은 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그의 처인 강릉김씨도 효행과 공경함이 남달랐다. 아들인 신붕도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를 껴안고 애걸하여 어려움에서 구했으며 상을 당해서는 정성을 다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현황]

정려각 안에 부모와 아들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고
「영산신씨이효일열정려중수기(靈山辛氏二孝一烈旌閭重修記)」
와 「영산신씨양세삼효열비명(靈山辛氏兩世三孝烈碑銘)」의 현판이 걸려 있다.
 

[개설]

신세린(辛世麟)의 처 김씨(金氏)는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구해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늘 애통하게 울면서 간장을 먹지 않았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죽으려고 하였으나 구조되어 죽지 못했다.
평생 동안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날마다 피죽을 조금씩 먹을 뿐이었다.
봄가을로 남편의 새 옷을 지어 놓고 불살랐다. 이러한 열행이 관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신붕(辛鵬)은 신세린(辛世麟)의 아들이다. 신붕은 평생 어버이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초상(初喪)을 당하여 어머니가 더운 방에서 자지 아니하자 자기는 거적을 깔고 밖에서 잤다.

임진왜란 때 신붕이 어머니를 업고 난을 피해 가다 적에게 붙잡혔는데 적들이 죽이려고 하자
어머니를 안고 애걸하였더니 내버려 두고 그냥 가버렸다.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간장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3년 동안 묘막(墓幕)에서 살면서 동문(洞門)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신붕의 나이가 60세였는데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으나 아무런 병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길 하늘이 도왔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임영문화대관』(강릉문화원, 1982)』
『임영(臨瀛)의 맥(脈)』(강릉문화원, 1989)』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江陵의 歷史와 文化遺蹟)』
『강릉대학교 박물관·문화재관리국·강릉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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