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효”정신이 투철한 두 딸의 아버지  곡강曲江 신사천辛斯蕆(11世) 

아버지의 忠과 두 딸의 孝烈
 
고려 후기 공민왕 때의 문신이었던 곡강 신사천( ? ∼1382) 두 딸의 충효와 절의를 기리고자 세워놓은 2기의 비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 산133에 위치해 있다.
한 채의 비각 안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이 비들은 낮은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조선 태종 5년(1405)에 세운 것이다. 1994년에 비각과 사당을 새로이 지어 그 안에 모셔두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봉익대부전공판서를 지내던 신사천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던 중, 왜적이 여러 차례 침략하자 이에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우왕 8년(1382)에 순절하였다. 그의 큰딸은 랑장 김우현의 처가 되어 남편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으며, 작은딸 역시 16세 처녀의 몸으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전법판서 조준이 경상도 체복사로 왔다가 이 사연을 듣고 왕에게 상소하니, 왕은 비를 세우도록 하고 포상을 내리었으며, 그 사연을『삼강행실록』에 기록하였다.
매년 4월 5일 곡강재 추모 제사
"전공판서 곡강, 신사천과 두 딸 열녀와 효녀를 기리는 삼강재三綱齋 = 上將軍公派 제11세 신사천辛斯蕆- 號 곡강曲江 先祖님과 두 딸이신 烈女 와 孝女를 모신 사당인 삼강사三綱祠의 제향을 관리하기 위한 재실/별칭 곡강재)를 매년 4월 5일(식목일)에 辛氏후손들이 모여서 선조를 추모追慕하고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신사천의 둘째 딸 孝義의 孝心
영산(靈山 : 지금의 경산남도 창녕군 영산읍) 사람으로 낭장郞將을 지낸 신사천은, 우왕禑王 8년(1382), 왜적 50여 기가 영산에 침구해오자 가족을 모두 데리고 피난 나섰다. 멸포에 이르니 배가 한 척 있었다. 피난민이 많았지만 다행히 데리고 간 가족 전부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신사천이 닻을 올리고 아들 신급열은 아버지 옆에서 닻줄을 잡고 있었다. 얼마 전 내린 장마로 강물이 급격히 불어 있어서 키를 잡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물살이 너무 센데요."
배가 강기슭을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빠른 물살에 닻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아, 이를 어쩐단 말이냐."
강 어귀에는 벌써 총칼을 든 왜적들이 나타나 배가 흘러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왕좌왕 떠내려가던 배가 속절없이 언덕에 닿으니 득달같이 왜적들이 달려들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시민들,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왜적의 총칼에 마구 쓰러졌다. 
신사천도 살해되었고 신급열과 배에 타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젊은 여자들만 몇몇 살아 있었다. 신사천의 딸은 가족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했으나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대항할 힘도 능력도 없다.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폼이 정신 나간 여자 같았다.
그때 한 왜적이 신사천의 딸을 잡아 끌었다. 
"너, 참 이쁘게 생겼구나. 일어나, 나랑 배에서 내리자."
실신한 사람처럼 멍해 있던 신사천의 딸이 벌떡 일어섰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치켜 세우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놔라, 이 도적놈아, 나는 너 따위 왜놈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고분고분 따라와."
왜적이 여인의 팔을 잡고 끌어내리려 했지만 끌려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텼다. 한참을 실랑이 벌이자 왜적의 얼굴이 벌개졌다.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여인을 어쩌지 못한 왜적이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내려, 내리란 말이닷."
"너를 여기서 죽일 수도 있다."
"죽여, 죽이란 말이야. 나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너희가 다 죽였으니 내 철천지 원수다. 원수를 따라가느니 여기서 죽는 것이 백번 천번 옳은 일이다. 죽여라. 어서 죽여."
순간 신사천의 딸이 왜적의 목을 움켜잡으면서 쓰러뜨렸다. 깜짝 놀란 왜적이 동시에 쓰러진 신씨 여인을 밀치고 일어나 칼로 찔러 죽였다. 
그녀의 나이 16세였다.
총칼을 들이대는 왜적에 벌벌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취하는 자세다. 
그 당시 16세인 신사천의 둘째딸 孝義는 두려움을 이기고 원수에 대항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외마디를 외쳤다. 비명횡사 했으나 그녀의 죽음은 가치가 있었다. 고려의 여인은 불굴의 의지를 지녔고 신념을 지키려는 신조가 투철했다.
나라에서 내려준 정려문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상서(上書)하여 드디어 그 곳에 비석을 세워서 충 · 효 · 열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나라에서 정려문을 만들어 그 고을 사람들에게 忠 · 孝 · 烈 정신精神을 기리게 하였으니, 지금껏 후세에까지 충신 신사천,   효녀 작은 딸 신효의, 열녀 김우현의 아내 신사천의 큰딸이 실존 인물로 계속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절요, 삼강행실록, 동국여지승람, 영산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