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의용장 신전

admin 2020.09.25 20:40 조회 수 : 140

辛씨인물  

일당백一當百 의용장

 

공公은 삼동골의 하잠荷岑문중의 최고 조(最高 祖)로써 시조 공으로 부터 18세손으로 12세 극예克禮의 6세손이며, 17세 선무원종공신 광윤光胤의 장자로서 1568년에 출생하였으며, 자字는 형노馨老 호號는 춘곡春谷이다. 1585(선조 18)년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로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의 벼슬에 올랐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첨정으로 황고皇考와 함께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한 구강鷗江 회맹록 會盟錄에 등재하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이삼한李三韓이 이르기를‘군가의용경인심간君家義勇驚人心肝’이라 하여 그 부자를 칭송하면서 그들의 전공은 가히 가상할 만하다고 흥려부興麗府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1971년 간행된 <울산울주지>에는 신광윤(辛光胤·1549~1617)이 아들 신전을 데리고 고을사람 유광서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의용장(義勇將) 신광윤' 깃발을 앞세우고 단조봉에 기대어 진을 쳤다. 의병들은 담을 쌓고 구덩이를 판 다음 군데군데 돌무더기도 쌓았다.(이는 지금도 금강골쪽 낭떠러지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울러 매복하고 위장을 하면서 적의 머리를 베고 무기를 많이 빼앗았다.

公은 경주부성慶州府城이 함락된 후 탈환을 위하여 결사항쟁할 것을 천신에 고하고 경주 문천蚊川 회맹록會盟錄에 등재하고 언양현의 의병장으로 참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5(선조 38)년에 부친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錄勳 되었다.

함경도의 길주와 명천산성을 수축하는데 있어서 축성의 일을 도맡아 관장케 하여 끝까지 마음을 다해 역사를 감독하여 노고가 가장 뚜렷하다고 함경도 감사 이시발李時發이 1606(선조 39)년 12월에‘축성의 공로자로 노고에 보답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고 별도로 논상論賞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장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무방할듯하여 황공하게 아울러 품합니다’고 임금에게 글을 올리고 비변사에서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선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公은 1612(광해 4)년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도진蛇渡鎭 첨사僉使가 되고, 1614(광해 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龍驤衛 부호군 副護軍겸 우림위羽林衛 장將에 제수되고, 1615(광해 7)년 충무위忠武衛 사과司果 겸 오위 장五衛 將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명천산성은 육진六鎭에 목의 위치이고 육진이 불안해진 뒤에는 함경도의 존망이 이 성을 수비해 내느냐의 여부에 결정될 것으로  명천현明川)을 명천도호(明川都護府로 승급시켜 항상 직급이 높고 재략이 있는 사람을 특별히 가려 보직함에 조정에서 公을 명천산성 수축 시 공로와 일당백의 용맹함을 인정하여 1620(광해 12)년 통정대부로 명천도호부사에 제수 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귀향하였으나 막내 여식을 김해부사 이정신李廷臣에게 억지로 출가시킴을 괴로워하다 끝내 1625(인조 3)년 졸(卒)하였다. 선영은 조부 진사 공進士 公 휘 축鷲 선영 아래 유좌酉坐에, 배 숙부인淑夫人 흥려박씨興麗朴氏 묘는 하잠 사기등砂器嶝 상봉 유좌에 있다. 슬하에 독자 희양希亮은 음서로 승의랑承議郎에 등용되고 통덕랑通德郎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