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을화 辛乙和

admin 2020.09.25 11:16 조회 수 : 128

辛씨인물  

언양 입향조 가선대부嘉善大夫

 

공公은 시조 정의공貞懿公의 13세 손이요. 고려高麗 우왕禑王 10년 1384년에 황고 축산군鷲山君 휘 극례克禮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조선조朝鮮朝 정종定宗 2년 1400년에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부사직副司直 의금부 동지사義禁府同知事 오위 장五衛 將 태종太宗 15년 1415년에 종2품관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에 제수되었다.

세종世宗은 공신功臣 극례克禮의 아들인 공公을 총애하였다는 사실이 실록에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 세종世宗 원년 1419년에 왜구의 노략질이 끊임없자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의 왜구倭寇 추격追擊시에 같이 계획을 도우라는 하명에 공公은 마침 자당慈堂의 극환劇患으로 그 명령命令을 받들지 못하고 사양하여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직에서 물러났으며, 임금은 극진히 효행한 공公을 용서하고 복귀시켜 공公을 세종世宗 8년 1426년에 외관직으로 자리를 옮겨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제수하였다. 공公은 경상도 좌수영인 울산군蔚山郡 개운포에 부임하여 경상좌도의 구역인 다대포진에서 영해 축산포진까지 동남 연안지역의 바다를 총지휘하게 되었으며 부관에 정4품 수군우후 1명과 산하에 종3품인 첨절제사 1명의 다대포영과 종4품인 수군만호 각 1명을 둔 개운포영 두모포영, 감포영 등 10개영을 관할하게 하였다.

당시 경상좌수영의 군제를 살펴보면 경상좌수사 1명, 우후 1명, 대변군관 100명, 선장 8명, 선감관 2명, 군기감관 1명, 지구관 6명, 기패관 70명, 도훈도 5명, 교사 20명, 사부 132명, 포수 156명, 표하군 191명, 타공 25명, 능로군 575명, 선고지기 6명 등의 인원과 전선 3척, 거북선 1척, 병선 5척, 탐선 1척, 사후선 11척 등의 군선이 있었다. 그리고 소속 진영에는 전선 9척, 거북선 2척, 병선 10척, 사후선 22척, 장졸 2,696명, 진영의 방수군 1만 440명, 첨격사부 911명, 선후운사부 312명, 차비군 111명, 탄사부 528명, 탄장 180명 등이 있었다.  

공公은 부임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줄어들어 평온하게 임기를 마치게 되었고 바다에 지친 공公은 산수山水에 관심이 많아 퇴임 후에 아름다움 산수와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에 아름다운 물을 사랑하며 푸르고 기이함이 있는 언양현彦陽縣 지내동池內洞에 이거移居하여 고요하고 아름다운 수죽사이를 거닐며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世宗 32년 경오庚午 1449에 향년享年 육십칠六十七세로 졸卒하셨다. 

공公은 슬하에 장남 휘 대해大海 차남 휘 인국仁國이 있으며 장남은 충의위忠義衛 장將 선전관宣傳官이다.

공公의 묘墓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지내리 산 44번지 임좌壬坐에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와 합분合墳되어 있다. 묘비墓碑는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1901에 완산인完山人 이고선 갈명碣銘하고, 신도비神道碑는 을축乙丑 1986년 문학박사 진성인眞城人 이가원李家源 비문을 작성하고 경주인慶州人 김성준金聖埈 글을 썼으며. 후손들은 언양지방문회를 구성하여 입향조인 13세 휘 을화乙和조, 14세 휘 대해大海조, 15세 휘 석환碩丸조 16세 휘 축鷲조 17세 휘 광윤光胤조 까지 제례와 묘역관리 등을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며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묘제를 거행하므로 거룩한 선조님들의 입조사적을 되새기며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