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독립운동가 신동욱辛東旭

admin 2020.09.22 00:58 조회 수 : 262

辛씨인물  

公은 1870년(고종 7)전남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충절의 가문 신성준辛性準(草堂公派 27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公이 출생한 시기를 전후하여 병인양요(1866)에 이어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는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 척왜양이와 위정척사론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던 역사적 격동기였다.

公은 재주가 빼어나서 어려서 능히 시를 지어 당대의 식자들을 놀라게 했다.약관弱冠에 윤자경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니 영특함이 사해에 떨치고 그 명성이 자자했다. 1891년 향시鄕試에 들고 복시覆試를 통과했다. 이 시기 국정의 난맥이 극에 달하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성현의 글을 읽고 자신의 수양에 힘썼다 1894년 이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다. 마침내 1905

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니 호남의 영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김준 김수용 심남일 정원집 등 호남장사가 항일의거를 할 때 공은 비밀리에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1910년 합방을 전후하여 호남의병이 연이어 패퇴하자 공은 동생 동화東華를 연락원으로 김수용의 참모 이영준과 함께 전국에 연락하여 쓸모있는 지사를 초모招募하고 심남일이 쓰다가 땅에 묻어둔 총기를 찾던 중 의사 조종후를 만나 러시아제 신무기 수입을 꾀하고 자금 확보에 노력하던 중 의병으로 활약했던 이봉래의 발설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1911. 1. 3 왜병이 돌입하여 公의 형제를 체포하여 장성헌병청에 구금하고 5개월 동안 극악한 고문을 가함에도 몇 번이나 기절하면서도 자백하지 않고 꿋꿋이 절개를 지켰다.

1911년 부친께서 은사금을 받지않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를 때 아우동화와 함께 나산분견소를 찾아가 그

들의 무리함을 꾸짖고 사생결단으로

음식물을 공여함에 헌병들도 그 효성

에 감동한 바 있다. 함평군지咸平郡誌

에는 公을 독립의군부 함평군 책임자

로 적고 있다. 또 심남일 장군의 아들

심상국에게도 군량미로 40가마를 조

달하여 의병운동의 군자금을 조달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의병운동으로 가산은 탕진되고 사

찰査察은 날로 더해 육신의 피폐는 날

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구국의 일념은

더욱 의기충천했다. 종심從心의 나이

에도 후학을 교도하고 민족혼을 불어

넣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시다가 그

렇게도 바라던 조국 광복을 보지못하

고 1942년에 생을 마감하며“너희들

은 창씨創氏해서는 안된다.”고 유언하

셨다. 향년 73세였다.

슬프다! 공은 안으로 쌓은 덕이 높

고, 밖으로 세상을 경륜하는 재능이

있었으되 이를 펴지 못한 채로 불우

하게 생을 마치셨다. 한편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운

수라 하겠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公

의 손자 중에는 광주향교 전교典敎를

지낸 대규大圭와 4선 국회의원으로

괌에서 타계하신 기하基河가 있다.

참고문헌 <靈山郡邑誌> <朝鮮王朝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