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호웅>

공公의 휘諱는 극례.

조선왕조에서 재상직을 역임한 공은 시조 경鏡의 12세손으로 공민왕 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귀貴와 정경부인 노盧씨 간의 5남중 3남으로 태어났다. 1359(공민왕 38)년,  공은 1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초부터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신도읍지인 한양성과 경복궁 건설공사를 담당하였으며, 1398(태조 7)년에 태조의 제 5자 방원芳遠 대 정도전 간에 권력 투쟁으로 발발한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종 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세자 방석芳碩과 정도전이 제거된 후 한경이궁조성제조漢京離宮造成提調로 임명되어 한양에 새궁궐 창덕궁 공사를 공公이 전담하여 완성하였다.

1400(정종 2)년 이방원의 위세를 시기한 태조의 4자 방간芳幹이 자신을 따르던 박포朴苞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방원편에 섰던 공公은 그 공로로 1400(정종 2)년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 정종이 양위讓位를 강요받았을 때‘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衷情으로 방원의 월권에 저항하였다. 권력의 실세에 맞선 공의 자세야말로 청사에 남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뒤에 왕이 된 방원은 자신의 집권과 정종의 하야를 반대했던 공의 올곧은 자세를 기려 공을 계속 중용하였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공은 1400년에 예조판서에, 1401(태종 1)년 5월에 좌군동지총재佐軍同知摠裁에, 1402년 10월에 황해도 도절제사에, 동년 12월에 참지승부사參知丞府事에, 1403년 8월에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어서 1405년 10월에 어서御書인 교서녹권敎書錄券을 하사받고 이듬해 4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정2품에, 같은 해 여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봉해지고 11월에 축산군鷲山君에 봉해졌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3남 충녕대군(세종)을 새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양녕측 중신으로 세자 교체의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1407(태종 7)년 파직 되어 경기도 양주로 유배되었다. 당시 공의 직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올린 직언이었다. 불리한 줄 알면서도 옳은 일이라 여기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명언으로 치는“천인지낙낙 불여일사지악악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천명이‘예예’하는 것은 한 명이‘아니오’라고 직언하는 것만 못하다.-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유배지에서도 나라일 만을 걱정하던 공은 마침내 1407년 11월 그믐날 향년 49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가인家人들이 유해를 도성으로 옮겨 빈소를 차렸는데 사간원 소속의 아전들이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 몰았다고 하니 이 어이 통분할 일이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이“예예”할 때 혼자서“아니오”라고 한 직언의 댓가가 이렇게 혹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해배解配직전 유배지에서 사거死去한 공의 죽음을 크게 애통해 하고 부지賻紙 200권, 미두米豆 각 50석을 하사하고 조회를 3일간 폐하였다. 비록 유명은 달리 하였지만 군신간의 교감은 이렇듯 아름다웠다. 같은 해 11월에는 왕이 예조에 명하여 공의 장례를 태조의 아우인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예대로 시행케 하며 관을 하사하고 빈소에 글을 내려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1408(태종 8)년 8월에 좌명 일등공신으로 격상시켜 예조판서가 주관토록 하였고, 뒤에 후손들이 올린 신원상소를 태종이 가납하여 고신을 회복하는 동시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을 증직하고, 부인 파주 염廉씨에게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의 증직을 제수하였다. 아울러 부조묘不祖墓를 광주光州 지방에 세워 불천위不遷位로 영구히 봉사하도록 명하였다.

조선 건국 초기 왕권을 둘러싸고 계속된 정변의 와중渦中에서도 끝까지 대의명분을 지키고 왕에게도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공의 충절은 후세의 사표가 되고 귀감이 될 것이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후사가 없고, 차남 계화季和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오위도총부사직五衛都摠府司直을 역임하였고 후손은 영광에 세거世居하였다. 3남 을화乙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경상좌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후손은 언양彦陽에 세거하였다. 

                                                                                                                      [대종보 제2호, 200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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