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씨인물 | http://인산仁山 신공제辛公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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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상관 (28世) 초당공파, 대종회 자문위원>
신공제辛公濟(1900~?) 그는 우리 신씨 일가들이 자랑 할 수 있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인산仁山.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1919년, 19세의 나이로 정주 일대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자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해로 망명하여 천도교 대표부에 소속되어 최동오崔東旿·남형우南亨祐 등과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한편, 이광수李光洙가 중심이 되어 발간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독립을 향한 열정을 글로 토로하는 한편, 당시 임시정부의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김여제金輿濟와 함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공채公債모집에 힘썼다.
1923년 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 등이 북경에서 군사통일 촉진회를 조직하고,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 등은 상해에서 국민 대표회의를 소집할 때 각 단체는 좌파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됨에 따라 파벌 간의 분규는 대단히 심각한 상태였다. 이때 仁山은 분규조정에 나서 각 파를 하나로 묶기 위해 자신의 조정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당시 상해 거주 독립운동가들은 그를 일러‘임시정부 최고의 지략을 가진 조정의 명수’라 칭하였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되기 이르렀다. 이에 仁山은 중국 국민당 요인 장소의張紹儀를 만나 조국의 광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중 합작임을 파악하고 이를 실현케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조국광복운동은 절정기를 맞게 된다. 상해·난징 등지에 사는 청년들을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교섭하여 입학시키고, 일제 주구와 밀정들을 숙청하면서 중국학생회와 중국혁명당과 긴밀한 연결을 취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중국혁명당에 가입하고 이듬해 중국 혁명에 가담하여 장제스蔣介石총사령부에 복무하게 되면서 중국국민당의 요인 오처성吳鐵城 등과 교제하면서 중국이 한국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중국인·인도인 등으로 구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 대표 겸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보다 폭 넓게 전개하였다. 1928년 동삼성東三省 당국이 한국동포를 일제의 밀정이라 하여 추방하려 하자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그 마찰을 해소하고, 이듬해 안창호 등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자 난징지부를 설치하고 박찬익朴贊翊등과 함께 주요간부로 활약하였다. 仁山의 알토란같은 20대代는 그렇게 조국 광복에 헌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립而立으로 불리는 30대에 들면서 그의 독립운동은 더욱 원숙하게 전개된다. 미흡하다고 여긴 학업에 정진하여 1930년에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망명지이긴 하지만 30세에 현재의 국회의원과 같은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특히 독립운동가의 대부 격인 안창호와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며 당의 조직과 대외 교섭에 혼신을 다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933년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에 대한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이듬해는 김규식 등과 중국인을 설득, 한중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항일전선을 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산의 괄목할만한 대외 조정능력을 엿보게 된다. 1935년 양기탁梁起鐸등과 제휴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월간《民族革命》과 주간《우리길》을 발행하는 한편, 군장교 양성에 모든 힘을 쏟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여러 단체의 대표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각단체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게 된다. 이것은 항저우(杭州)의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 등 3개 정당과 미주 및 각지에 산재한 대한인독립단·동지회·국민회·애국부인회·단합회·애국단 등 6개의 단체 대표들이었다. 조정의 명수로서 한국광복전선을 구축한 仁山은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중국국민당 중앙당부 총간사와 중앙전시독도단中央戰時督導團 단장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불혹의 40대에 들면서 인산은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신한 민주당 상무위원 겸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한중문화협회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친선에 기여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한 조국에 귀국한 뒤, 檀國大와 大邱 靑邱大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외무부 자문위원·한국독립당최고위원·독립동지회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그 사망 년·월·일은 알 수 없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대종보 제6호, 2006.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