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辛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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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辛守) : 이조 연산군 때, 개포면 경진리 옥동(玉洞) 사람, 자는 가교(可矯), 호는 쌍괴헌(雙槐軒), 본관은 영월, 현감 보중(縣監寶重)의 장자, 옥계(玉溪) 달정(達廷)의 아버지이다. 점필재 김종직(점畢齋金宗直)의 제자, 성종 때 성균관 진사시(成均館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천거되어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다. 묘는 지보면 신기리(新基里, 面所에서 3마장 떨어짐) 백야산 간좌(白也山艮坐)에 있다. 후손들은 예천, 의성 등지에서 살고 있다. 무오사화(1498) 때 화를 피하여 낙향하여 노포(蘆浦, 玉洞)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그 목판(木版) 25매 가량이 개포면 이사리(伊泗里)에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고 있다(族譜, 嶠南誌1937, 醴泉郡誌 1939,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의 金石文] :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개포면 경진리 노포(蘆浦)에서 숨어지내면서 집 앞에 양한루(養閑樓)를 짓고 홰나무(槐木) 두 그루를 심어 쌍괴헌이라 하였다. 묘는 지보면 소화리 백야동(白也洞) 간좌(艮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장악원정 진성 이휘령(李彙寧)이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신수 : 1858년 목판본 雙槐軒集 全...辛守/ http://www.kobay.co.kr(daum 2010)
신수 : 雙槐軒辛公遺集/ 현대어서명 쌍괴헌신공유집/ 편저자(한자) 辛守(朝鮮) 著/ 판본사항 木版本/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1冊(37張)/ 편저자(한글) 신수(조선) 저/ 간행연도 [憲宗9年(1843) 序]/ 간행자 [刊者未詳]/ 책크기 30×21cm/ 匡郭 四周雙邊, 半葉匡郭:19.2×15.7cm, 有界, 10行 18字 版心 上下內向花紋魚尾 표기문자/ 表紙,版心,卷頭書名 表紙書名:雙槐軒遺稿集/ 序,跋,卷首,卷末 序:上之九年癸卯(1843)…李彙寧, 上十五年己未(1739)…金琦 書/ 四部분류 集部 別集類 一般 기타(daum 2010)
신수 : 雙槐軒辛公遺集 저자 辛守 저/ 쌍괴헌신공유집 간행년대 1843년(헌종 9)./ 1책 판본 사이즈 30×21㎝./ "조선 전기의 학자 辛守의 시문집. 1739년(영조 15) 후손 翼道?以道 등이 편집하고, 1843년(헌종 9) 후손 聖麟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李彙寧의 서문과 金琦의 舊序가 있고, 발문은 없다. 서문에 이어 목록이 있고, 시 75수, 歌 3수, 賦 1편, 銘 1편, 跋 3편, 拾遺 3편, 부록으로 〈雙槐軒詩序〉, 〈次養軒樓韻〉 21수, 〈雙槐軒遺事記〉, 그리고 李彙寧이 쓴 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雙槐軒遺事記〉에 따르면, 辛守는 어려서부터 兪好仁 등과 교유하였으며 襄陽에 은거하면서 은거지 남쪽 정원에 두 그루의 홰나무를 심고는 그것을 堂號로 삼았다고 한다. 시는 대개 敍景?詠物詩로서 초일한 심사를 읊은 것이 많다. 〈乙卯秋乘舟上京到梨浦詠月〉은 1495년 가을에 배를 타고 梨浦에 이르러 달빛이 비치는 江岸의 풍경을 읊은 것으로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聞圓覺寺中佛像盡黜作爲漢城府喜而賦詩〉는 원각사를 지을 때 국고를 허비해 많은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는 것과 이제 불당을 모두 치워버리니 기쁘다는 자신의 심경을 읊은 배불적 성격을 띤 시다. 이 시의 附註에 원각사는 세조 때 창건하였으나 그 뒤 연산군이 그곳을 기생 양성소인 聯芳院으로 만들었다가 중종 때 漢城府에서 사용하는 등, 원각사가 佛寺로서의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있다. 〈贈道海入禪〉은 1518년(중종 13)에 지은 것으로 우연히 만난 道海라는 禪僧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의 禪道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찬양한 시이다. 또한, 당시 으뜸가는 시인이었던 朴誾의 시에 차운한 〈次分翠軒朴誾詩集中韻〉을 비롯해 〈次安德器八詠詩韻〉 등의 차운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歎夫人〉은 여자의 일생이 부자유스러운 것에 대해 동정의 시각에서 탄식조로 읊은 것으로, 당시 남성들의 대여성관을 짐작하게 한다. 歌의 〈養閒樓歌〉는 저자의 은둔 시절에 읊은 것으로 閒居自適하는 생활을 흥취 있게 표현하였다. (안순태)(daum 2010)
| 소장/전승 |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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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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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2025.08.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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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2025.09.06 11:57
옥계 할아버지 후손입니다
열심히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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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26.02.21 03:54
대종회님 봉화산님 반갑습니다. 저는 옥계공 15대손입니다.옥계공 묘갈명은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지은 신달정(辛達廷, 1483~1524)의 묘갈명은 효성이 지극했던 인물의 삶을 기리고, 유교적 효(孝)의 가치를 강조한 글입니다.
이 글은 『퇴계집(退溪集)』 권47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경북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 어소산에 있는 신달정의 묘소 앞에 그 비석이 실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물 배경: 신달정(辛達廷)
본관 및 가계: 영월 신씨(寧越 辛氏)로, 아버지는 기자전 참봉을 지낸 신수(辛守)입니다.
생애: 1483년에 태어나 152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퇴계 이황보다 18세 연상의 인물이나, 퇴계가 그의 덕행을 기려 묘갈명(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의 글)을 지었습니다.
2. 주요 내용: 극한의 효성(孝誠)
퇴계가 이 묘갈명에서 가장 강조한 점은 신달정의 지극한 효심입니다.
거상(居喪)의 도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예법을 극진히 지켰으며,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몹시 상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멸성(滅性)에 대한 경계: 퇴계는 글에서 "성인이 효를 숭상하되, 너무 슬퍼하여 몸을 해치는 것(멸성)은 효도가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언급하면서도, 신달정의 효심이 그만큼 순수하고 깊었음을 역설적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처사(處士)로서의 삶: 벼슬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기보다 향리에서 부모를 모시고 학문을 닦으며 유교적 덕목을 실천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3. 비석의 특징
조성 시기: 퇴계가 글을 지은 것은 1566년(명종 21, 가정 45년) 무렵이나, 실제 비석이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조선 후기(1670년경)입니다.
구성: 비문은 퇴계이황이 지었고, 글씨는 여성군 송인(宋寅)이썼습니다. 비석 뒷면 윗부분에 제액(비석의 제목)을 새긴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금석문 연구에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요약 및 의의
퇴계 이황은 신달정을 통해 '지극한 효'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리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비록 신달정이 중앙 정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인물은 아니었으나, 퇴계라는 거유(巨儒)가 직접 묘갈명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영남 유림에서 그의 도덕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입증합니다.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