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씨인물 | http://취산군鷲山君 신은윤辛殷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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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신남교(덕재공 31世 : 여주종회 전 회장>
공의 휘는 은윤(殷尹), 자는 상경(商경), 영산(靈山)인 이다. 시조 이신 고려 금자광록대부 정의공(貞懿公) 휘 경(鏡)의 15세손이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덕재공파(德齋公派) 파조 휘 천(蕆)이 6대조이다. 증조부는 사재감 부정 (증 호조판서)을 지낸 휘 종선(從善), 조부는 별시위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한 휘 철산(鐵山), 부친은 석성현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중린(仲磷)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婦人) 개성 고(高)씨로 1458년 3월 15일 한성부 종남산 아래의 자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민함이 보통 이상이었고, 효우(孝友)함이 천성
에 근본 하였다. 다섯 살에 시문을 지었으며, 큰 글씨 쓰는 것이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더 낫다는 세평이 자자하였다. 종숙 연빙당(淵冰堂) 신석조(辛碩祖) 문하에 수업하였으며 배움으로 성취를 이루니 세상에서는 덕재(德齋) 음덕을 크게 받았다고 평하였다.
1477년 18세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490년 부사맹으로 벼슬길에 나가 1492년 선전관으로 복무하던중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벼슬을 내어놓고 낙향하였다. 부친 참판공이 돌아가심에 죽으로 끼니를 떼우며 시묘 살이를 했다. 복상중 애통하고 슬퍼함이 더 할 수 없어 목숨을 해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는 공의 효심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게 한다.
이렇게 부친 삼년상을 치루고 학행(學行)으로 1495년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1495년 경상도 도사, 1501년 사헌부 지평, 1501년 장례원 판결사(判決使), 1506년 첨지중추원부사로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는 중종반정에 가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정국공신(靖國功臣) 봉(封) 취산군(鷲山君) 가선대부가 되었다. 박원종 홍경구 성희안을 비롯한 반정세력들은 신수근의 딸인 신(愼)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中宗)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중종은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였다. 폐위하는 과정에서 공신(功臣)으로서 지금까지 함께한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 된다며 신씨 폐위를 반대하여 반정세력들의 모함과 빗발치는 상소가 있었으나 공의 강직한 성품과 학식의 고매함과 문장과 덕행을 아는 중종대왕께서는 내치지 않고 여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공은 완곡하게 사양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결연히 용퇴하여 벼슬자리를 버렸으니 이에 중종은 동지중추원부사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하였다. 봉조하란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나이70세가 되면 벼슬에서 물러남을 허락했는데 이들에게 봉조하라는 칭호를 주고 종신토록 그 품계에 알맞은 봉록(俸祿)을 주고 국가적인 의식에 조복을 입고 참여하게 한 제도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봉조하를 제수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특별히 가선대부에 직계를 올리고 취산군에 봉하였다.
봉록으로 받은 어사전 40결, 은 10량 등 모두를 국가에 반납하고 단지 노비만 데리고 여주후포(驪州後浦) 선영아래 퇴거 학자들과 날마다 도학을 강론하니 나갈 때와 물러남을 아는 선비의 맑은 덕을 살펴 볼 수 있다. 1508년 5월 17일 정침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51세였다. 부고가 들리자 중종대왕은 애도하시고 치제관(致祭官)을 보내 제례를 주관하게 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더하고 불천위(不遷位)를
내렸다.
불천위(不遷位)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영원히 별도의 사당(사당)에 모시도록 허락한 신위(神位)이다 이를 받음은 가문(家門)의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공께서는 당대 최고의 명필로서 일찍 성종대왕에게 족자를 드리며 올린 상소에 마음이 바르면 붓이 바르다하여 칭송과 하사품을 받았고 임금이 내린 교서에 경은 학업은 시서에 탁월하고 글씨가 중국 왕희지를 능가한다 기록하였으니 당시 경상(卿相)집안의 비문에 전서와 해서가 금석문에 올라있는 것이 많으며 중국 사신들도 경의 필적을 받아가기를 원하였다.
한국 역대 명인의 필적(김석배 편전) 동국금석문평(오세창저)에 등재되어 공의 신필을 볼 수있다.
중종대왕이 내린 공신녹훈교서
정국공신 가선대부 봉조하 신은윤
왕은 말하노라 왕실에 공이 있는 신하는 반드시 큰상으로 보답하는것은 예부터 도리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학문은 시경과 서경에 근본 하였고, 서예는 종요와 왕희지 보다 빼어났다. 이름이 과거에 드날리어 같은 무리들이 그의 풍모와 위엄에 무색해졌고, 지위가 요직에 오르자 관료들이 그의 민첩함에 복종했다 이른바 호걸의 선비이다. 그런데 지난날 하늘이 도와 주시지 않고 국운이 중도에 비색해저
상하가 허등대고 중사가 허덕일 때 다행히 선왕께서 남겨주신 두 세 대신에 힘입어 큰 계획을 도모함에 나를 추대하였다. 그대는 능히 분주히 솔선하고 의로운 일에 나가 힘을 합하니 잠깐 사이에 대사를 확정시키고 만세에 끝없는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그대의 공을 생각하건대 감히 어찌 잊어버리랴. 이에 영광스런 후작으로 정국 4등 공신으로 삼고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전하며 그의 부모 처자 적장자에게 작위를 주어 세습하며 그 녹을 잃지 않게하며 영세에 이르도록 한다. 아울러 번당 2인, 노비 5인, 군사 1명, 전답 40결, 은 10량, 표리 1단과 내구마 1필을 하사하니 와서 수령하라.
아, 아- 나의 영을 정성스레 친면하고 변치 않는 진정을 더욱 다하자 나의 정치를 보좌하고 끝없는 관심을 영원히 간직하라 그러므로 이 교서로서 내 생각을 보이니 알아 들을 지어다. 정덕 2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