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신경가문 문화유산 탐방

   여기에 영산신씨(靈山辛氏)4 백여 년 이상 세거하여온 한 집성촌(集姓村)을 소개하고자 한다.

   울산 남구 무거동에서 부산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조금가면 울주군 청량읍의 율리이며 오른편에 울주군청 청사와 문수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해운대 고속도로 율리 톨게이트 진입로에 이르며첫 번 째 우회전하면 삼동면으로 향하는 율리삼동로에 이른다.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가면 문수산과 남암산 사이의 율리터널을 지나 삼동로에 접하고삼동로를 따라 한 고개를 넘으면 삼동초등학교를 왼편으로 돌아서면 오른편에 삼동면사무소가 있으며 통도사 방향으로 4km정도 가면 오른편에 옛 조일국민학교 자리에 삼동체육관이 있고 이어 왼편에 보라CC 골프장 입구를 지나 조금가면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 지랑마을에 이른다.   지랑마을 세거비.jpg

 

 

 

   이곳에는 봉양재(鳳陽齋)란 제실이 있으며 제실입구 도로변에 지랑마을 영산신씨세거지(靈山辛氏世居地)란 갈석비(碣石碑)3m 정도 높이로 우뚝하게 세워져 있으며 그 비석의 후면에 마을의 내력 등 아래와 같이 비문이 각명(刻銘)되어 있다.

 

[영축산 정기가 정족산에 이어 봉양산 기슭에 모이고 방기천이 조일 천으로 상금수와 합류하여 지랑천을 이루니, 산수가 조화로운 양지쪽 에 옹기종기 터전이 마련된 이 고장은 영산신씨 집성촌 지랑 마을이다. 영산신씨 시조공으로 13세손 乙和조가 관직이 경상좌도 수사요 언양 입향조이며, 15세손 碩丸조는 도총부도총관으로 사초문제 처벌을 위해 연산군이 명한 지의금부사를 버리고 하잠으로 은둔하였으며, 17세손 光胤조는 통정대부 훈련원 판관으로 선무원종공신이며, 아들 삼형제 중 막내 18세손 어모장군 훈련원판관 蓁조가 지랑 입향조이다. 백형 도호부사 荃은 하잠에 세거하고 중형 증 공조참의 萱은 방기에 정착 하여 셋 마을이 모두 같다 하여 三同이 되었나 보며, 지랑 마을은 삼 형제 중 막내의 후손이라 하여 末郞이라 고도 하나 조선중기에 芝山 이라 하였으며, 조선후기에 旨朗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여기 정착 후 사백년 가까운 성상이 흐르는 사이에 산하가 변천되고 병난이 거듭되었으나 많은 후손이 관계 학계 재계에 진출하여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기에 이제 고법에 의하여 세거비를 삼가 세워 후세에 전 하고 자 하니 영산신씨 앞날의 번영이 더욱 기대되며 마을 역시 자손만대로 영구불멸 할 것이며 더욱 번창하리라 믿는다.]

 

   이곳 지랑(旨朗)마을은 원래 지금 마을이 있는 곳의 서편 골의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며 소년죽음이 하도 많아 걱정을 하던 중, 어느 날 지나가는 도사에게 사연을 이야기하고 방비책을 물러보니 도사가 말하기를 [담뱃대에 담배 한대를 넣고 불을 댕겨 담배를 피우 며 마을 아래로 내려가다가 담뱃불이 꺼지는 위치에 자리를 잡아 마을 을 옮기면 모든 액운을 피할 수 있다]하여 지금 마을 위치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으며 원 마을이 있었다는 골의 골짜기 주위 에는 사기그릇 및 옹기조각이 지금도 많이 발견되어 옛이야기를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마을의 앞에는 용마등(龍馬嶝)이 솟아 있고 그 위에 투구등(鬪狗嶝), 우측에는 날카로운 칼등(劍嶝) 등 마을의 형상 이 장군(將軍) 태산혈(胎産血)이라 하여 옛 부터 무관이 태어나는 곳 이라 선조들의 무과급제를 후세에 알림이라고 영산신씨(靈山辛氏) 후손들은 말하고 있다.

 

   지랑(旨朗)마을의 형성연도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또한 명칭도 일명 말랑(末郞)이라고도 하는데 한때 지산(芝山) 이라 고도 표기하였으며, 지랑 마을은 영산신씨(靈山辛氏)의 집성촌으로 지금부터 5백2십여 년 전인 1498년 연산군 4 년(무오:戊午)에 삼동골 하잠으로 은둔(隱遁)한 신석환(辛碩丸)조의 손자 3형제 중 장손 신전(辛荃)이 하잠에 차손인 신훤(辛萱)은 방기에, 3손인 신진(辛蓁) 은 지랑에 각각 세거(世居)함에 따라 신진(辛蓁)의 아들인 희원(希遠) 의 출생이 1626년 인조4년 병인(丙寅)이므로 사백여 년 전통의 신씨들이 30여 호가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라 본다.

 

열부김시정려각.jpg   마을 어귀에 정여각이 있는데 이는 영산신씨 21세손인 신몽용(辛夢龍)의 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열부(烈婦)의 열정을 기리기 위하여 1748년 조선조 21대 영조 24(戊辰)년에 조정(朝廷)에서 포상(褒賞)을 내리시고 이 정여각(旌閭閣)이 세워졌다. 그 후 풍우(風雨)에 퇴락(頹落)하고 회신(灰燼)된 것을 1955년도에 문중 종인들의 성의로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마을중간에 있는 봉양재(鳳陽齋)란 제실(祭室)은 1926 병인(丙寅)년 에 지랑 입향조 어모장군(禦侮將軍) 신진(辛蓁)의 11세손인 신상현(辛相賢)이 주축(主軸)이 되어 건립하였으며, 영축산(靈鷲山) 맥을 이은 봉양산(鳳陽山)의 정기가 지랑 문중을 번창(繁昌)하게 하였으므로 마을 앞산 이름을 따서 명칭은 봉양재(鳳陽齋)라 하고 대문(大門)은 먼 옛날의 선조들의 사랑과 봉양산의 정기가 돌아온다는 뜻에서 원귀문(遠歸門)이라 한다.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정여각에서 열부 김씨 향사를 올리고 봉양재에서 음복하며 신씨들의 화목을 다짐하고 있으며. 특히 2004년 5월 2일에는 열부 향사를 마치고 자랑스러운 인물로 지랑문중을 빛낸 학계 재계의 석학을 초청하여 화수회에서 기념패를 수여하고 문중의 명예를 빛내고 일가들의 귀감이 된 석학들의 이력을 일일이 낭독하며 높이 치하하며 문중원들의 친목을 다짐한바 있다. 

  그 내용은 30여 호 살고 있는 본 마을에서 장본인(張本人) 또는 아버지가 출생한 자녀가 학계의 석학으로 박사 6명(대학총장 1명 포함)과 삼성그룹에서 대표이사 사장이 된 경제계 석학이 포함되어 있다.

 

※ 참고 : 기념패 수여 받은 자 (나이순)

 

○ 살수택 막내 아들

  신기석(辛基碩)1941년생 행정학박사 교수 동아대학 대학원장 등 역임

○ 둔기택 두 째 아들

  신상전(辛相田)1943년생 독문학박사 교수 덕성여자대학교 총장 등 역임

○ 미동택 손자로 큰 아들의 셋 째

  신형강(辛亨康)1943년생 전산학박사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등 역임

○ 미동택 손자로 큰 아들의 넷 째

  신필열(辛弼烈)1946년생 삼성그룹 사장 삼성라이온스대표이사 사장 등 역임

○ 덕산택 손자로 두 째 아들 두 째

  신시옥(辛時玉)1955년생 의학박사 교수 충북대학병원 의료처장 등 역임

○ 살수택 손자로 두 째 아들의 셋 째

  신지태(辛志太)1954년생 공학박사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 등 역임

○ 삼동택 장손 

  신상문(辛相文)1971년생 공학박사 부교수 인제대학교 교수 등 역임

 

   각 성씨별 집성촌이 허다하지만 30여 호의 작은 집성촌으로 이렇게 박사가 많이 태어난 곳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재삼 소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