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경양辛景良

admin 2020.09.25 12:00 조회 수 : 192

辛씨인물  

제20世 문의입향조文義入鄕祖

 

당공파 신경양(1337 ~ 1612)은 충북 상당구 문의입향조 이시다. 공公은 시조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신경辛鏡의 20世손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전주全州 이씨이다

공公은 용양위부호군, 경력 통정대부行중추부첨지사를 역임 했다. 개성부유수 집현전대제학을 지낸 14세 시호 문희공 석조는 공의 6세조이다. 문의 입향 전, 계산 증평 덕상리는 공의 고조 16세 휘 영의는 성균관 진사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종형 영희는 일찌기 사마시급제 하여 화禍를 면하기 위해 정국의 어지러움을 인식하고 천안직산에 은거하게 되었고, 공은 충남 예산을 거쳐 충북 괴산 증평 덕상에 거처를 정하고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과 덕행을 실행하니 세인들로 하여금 칭송과 추앙을 받았다. 이러한 선조님의 엄하고 올곧은 명문가 후손의 자긍심을 간직하고 문장학행文章學行을 떨치게 되었으며 효우지례孝友持禮를 다하였다. 

공은 1567년 10월27일 덕상리에서 부父 휘 복후 모母 정선 김씨와 백중계중서 차남으로 출생 하였다. 천성이 온화하고 재주가 뛰어나 총명하여 조기 취학 학문에 정진하니 또한 문장에 뛰어났다. 부모에게 효를 다함으로서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극존예제克尊禮制로서 과묵하니 향인이 유덕군자有德君子라 지칭 하였다. 공은 용양위부호군 경력 중추 부첨지사로서 아무 연고 없는 자신의 향리 덕상리를 떠나 이곳 산덕리다.

1562년 산자수명한 길지에 정처이거 하니 비로소 산덕신씨 시조가 되었다. 공은 이십여세에 충효절의소과경상승忠孝節義小科慶相承하고 강마도의講磨道義 후학훈육後學訓育 통하여 선비정신 함양 고취와 향민들로 하여금 덕행을 설파 하였다.

공은 서기1612년12월8일 향년 75세 일기로 졸卒하다, 많은 지인 문인들이 공의 타계를 애도 하였으며 배配 전주이씨 서기1660년 2월28일 향년 66세 일기로 졸卒 하였다.

슬하에 2남을 두었고 장남 덕용은 중추부사 경산현령 이요 차남 덕기는  선무랑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공께서 이거 정착하신 1562년 이래 457년의 대를 이어 세거하여 세월의 발자취가 말해 주듯 40여 가구의 혈연 동족공동체로서 선영을 수호하며 산덕신씨의 집성촌임을 자부심과 긍지 또한 대단하다. 

선조님 음덕을 받아 다재다능한 후손들이 사회 각분야에 대거 진출하여 우리 영산 辛門에 산덕신씨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4.19문단 대표시인 신동문, 4선 국회의원. 대한민국 헌정회장 신경식, 서울평화시장㈜마을금고이사장 신송홍, 충북엽연초생산조합교육원장 신동인. 충북도의회사무처장 신찬인, 충북개발공사감사 신만인, 충북도의 회의정서기관 신우인, 교장 신달호, 교장 신백인, 교장 신복인, 교장 신학용, 면장 신문교, 조합장 신석호, 한국프로골프연맹이사, 프로골퍼 신섭인, mbc tv 주말드라마 출연 연극배우 신다은, 순천향의대 신응진교수, 고려대학생처장 신지영교수, 서울시립대 신희인교수, 법조계 신경주 등 걸출한 재사들이 배출되어 각계 다방면에 진출하여 산덕辛씨 임을 선양하고 있다

입향조 신경양을 뿌리로 한 문중에서 숭조정신을 바탕으로 선조음덕에 감사하고 종친간의 화합과 문중발전을 위하여 공이 타계 한지 407년 되던 해 1995년 3월에는 종친 모두의 뜻을 모아 퇴락한 선조의 묘소에 상석 망주 묘갈명 선영 정화사업을 완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墓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산덕리 송곡산 쌍봉으로 모셔져 있다.      <신경두 (34世 초당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