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상뢰(辛商賚) - 정사원종(靖社原從) 1등공신

신엽 2020.09.23 22:40 조회 수 : 170

신상뢰의 자는 계응(季膺)이며 시호는 풍천공(豊川公)이다.

본관은 영월(寧越)-판서공파 23世이니 선조(宣祖)辛巳 1581년 12월 8일 경주 초제리 본가에서 탄생하였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청안이씨(淸安李氏) 판관(判官) 이방린(李芳鄰)의 딸이다.

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이 보통사람과 달라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

나이 겨우 이십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鄕里)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대장부(大丈夫)가 이 같은 난을 만나 국가의 위급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민(臣民)의 도리라 하겠는가 하고, 붓을 던지며 활을 잡고 동지(同志)를 규합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사실은 영남창의록(嶺南倡義錄)에 실려있다. 선조(宣祖)36년(1603)에 병절교위(秉節校尉)가 되고 다음해 정약장군선전관(定겫將軍宣傳官)이 제수되었다. 1609년 광해군 원년 선조(宣祖)국장 시에 왕(王)을 호위(扈衛)한 공로로 내금위소위장군(內禁衛昭威將軍)이 되고 광해군 7년에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어 건공장군행용양위사과(建功將軍궋괟讓衛司果)에 올랐다.

인조(仁祖)원년 1월 위원군수(渭原郡守)로 나갔다가 3월에 은율현감(殷栗縣監)에 전임되고 5월에 정사원종 1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니 왕이 전지하여 이르기를 의리를 잡는데 힘을 다함은 신하가 충성을 다하는 것이고 그 공적을 기록하여 공을 갚음은 국가가 이를 포상하는 것이니 국법은 비록 옛법이나 왕명은 오직 새롭다.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 백성들은 희망이 막히고 인륜은 이미 풀렸으나 어찌 남면(南面)의 마음을 품겠는가 마는 종사(宗社)가 장차 기우려지는지라 드디어 좌단(左但)의 계획을 결행하여 백육(百괯)에 떨어진 끝을 이으며 동덕삼천(同德三千)의 힘을 입어 너의 경사

대부(卿士大夫)가 모두 이 일에 간여하였다.

따라서 각기 그 공을 가려 종정산하(鍾鼎山河)하고 의상비비(衣裳?匪)하여 적으나마 큰 정벌의 공로에 보답하였다. 이에 실제 관작에 봉한 나머지는 다시 크고 작은 등급으로 나누어 원종(原從)의 반열에 수록하고 그 경중의 은혜를 맹부(盟府)의 서책에 실어 영원히

자손의 안락에 미치게 하기 위하여 사후(死後)의 부조(不眺)를 명하고 패(牌)와 녹권(錄券)을 하사한다 하였다.

인조 4년 경상좌도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侯)가 제수되고 이어 풍천도 호부사겸 해주병마절제도위(豊川都護府使兼海州兵馬節制都尉)가 되었다

병자(丙子年)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한 사실이 남한창의록(南漢倡義錄)에 실려 있다. 풍천(豊川)을 다스릴 때 치적(治績)이 있어 그 군민(郡民)들이 추사비(追思碑)를 세우고 그 업적을 기렸다.

인조18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로 서 스스로 즐기며 또한 친구들과 더불어 산수(山水)를 찾아 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날을 보냈다. 인조21년 계미 7월 8일에 향년 72세로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