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신씨
 
 
 
 
 
辛씨인물

신석정(1907-1974) 시인의 본명은 석정錫正, 관향은 영월寧越이고, 아호는 석정夕汀을 주로 썼다. 구한말 간재艮齋 전우田愚문하에서 유학을 닦으신 신기온辛基溫과 이윤옥李允玉의 차남으로 1907년 7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망국의 한에 젖은 시인은 명리보다 시문의 길을 걸었다. 1924년 조선·동아·중앙의 지상에 시를 발표하였다. 1926년 스무 살 때 김제 만경인 박소정朴小汀과 혼례를 올렸다. 슬하에 4남4녀를 두었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박한영朴漢永문하에서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년여 끝에 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귀향하여 1933년 지금 석정문학관 경내에 있는 고택인 청구원靑丘園 집을 마련했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서정시인-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로 중앙문단 데뷰

1939년 첫 시집「촛불」이 발간되자 김기림은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라 말하였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로서 독자들의 공감대 또한 드넓었다. 광복 후에도 시인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결성에 참여했다. 부안에서‘중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개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1946년 3월 1일 부안중학교가 개교되어 서울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왔으나 마땅한‘국어’ 담당자가 없어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그 후 시창작과 교육으로 일관했다. 6·25 한국전쟁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55세) 5월 5.16 직후‘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민족일보」에 발표한「춘궁은 다가오는데」,「전아사餞迓詞」등의 작품 때문에 당국에 구금되었다가 8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시문학」지에 시〈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74년 7월 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詩歷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렇게 일생을 오로지 시 창작에만 몰두한 시인은 흔치 않다. 설령 오랜 문단 활동을 지속했다 해도 끝내는 이를 발판으로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일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감했다. 

1973년 12월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졸도한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서 투병했으나 1974년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석정 시인의 전주자택)에서 향년 예순여덟으로 생을 마쳤다.

석정시인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를 꾸려야 할 직장도 버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어서,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본어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차라리 푸른 대’로 살기 위하여 아예 붓을 꺾었다.

석정시인은 자연의 세계에서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소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시문학사는 첫 시집인「촛불」에서‘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의 울부짖음은 잊고‘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속삭임만을 기억하여, 시인의 시세계를‘목가시’니‘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안에 유폐시켜 놓았다. 그렇지만 그 꿈의 속삭임조차도 일상의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을‘먼 나라’에 설정한 아이러니이어서‘그 먼 나라’가 부재하는 현실을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석정시인은 한시에도 능했다. 그의 조부, 부친과 맏형인 신석갑辛錫鉀(1904-1975)이 한학과 한시에 조예가 깊었듯이 석정 또한 한시漢詩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다. 자연히 한시도 번역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한시 번역서가 없을 때 석정이 번역한 한시는 교과서다운 역할을 당당했다. 또 향리 출신인 이매창李梅窓의 시를 번역하여 지방의 기생 시인으로 자칫 묻혀버릴 그녀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로 부각시켰다.

시인은 때로는 논설과 수필로 자신과 이웃과 국가와 자연이 가지는 당위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이성과 감성을 통하여 여과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기와 기행, 그리고 편지와 전기 등 다양한 장르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노출시켜 사회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습작 투고기에 소설을 쓰기도 했다. 시인은 시론을 직접 집필하여 이를 대학에서 강의하고 이에 입각하여 각종 현상모집에서 시작품을 심사하고, 이러한 시론으로 많은 후학들의 시집이나 저서에 서문을 얹어 그들을 지도 편달하고 고무시켰다. 또 문예지의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시인들을 문단에 등용시켰다.      <신석정(1907-1974) 시인의 본명은 석정錫正, 관향은 영월寧越이고, 아호는 석정夕汀을 주로 썼다. 구한말 간재艮齋 전우田愚문하에서 유학을 닦으신 신기온辛基溫과 이윤옥李允玉의 차남으로 1907년 7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망국의 한에 젖은 시인은 명리보다 시문의 길을 걸었다. 1924년 조선·동아·중앙의 지상에 시를 발표하였다. 1926년 스무 살 때 김제 만경인 박소정朴小汀과 혼례를 올렸다. 슬하에 4남4녀를 두었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박한영朴漢永문하에서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년여 끝에 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귀향하여 1933년 지금 석정문학관 경내에 있는 고택인 청구원靑丘園 집을 마련했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서정시인-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로 중앙문단 데뷰

1939년 첫 시집「촛불」이 발간되자 김기림은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라 말하였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로서 독자들의 공감대 또한 드넓었다. 광복 후에도 시인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결성에 참여했다. 부안에서‘중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개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1946년 3월 1일 부안중학교가 개교되어 서울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왔으나 마땅한‘국어’ 담당자가 없어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그 후 시창작과 교육으로 일관했다. 6·25 한국전쟁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55세) 5월 5.16 직후‘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민족일보」에 발표한「춘궁은 다가오는데」,「전아사餞迓詞」등의 작품 때문에 당국에 구금되었다가 8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시문학」지에 시〈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74년 7월 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詩歷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렇게 일생을 오로지 시 창작에만 몰두한 시인은 흔치 않다. 설령 오랜 문단 활동을 지속했다 해도 끝내는 이를 발판으로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일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감했다. 

1973년 12월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졸도한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서 투병했으나 1974년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석정 시인의 전주자택)에서 향년 예순여덟으로 생을 마쳤다.

석정시인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를 꾸려야 할 직장도 버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어서,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본어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차라리 푸른 대’로 살기 위하여 아예 붓을 꺾었다.

석정시인은 자연의 세계에서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소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시문학사는 첫 시집인「촛불」에서‘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의 울부짖음은 잊고‘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속삭임만을 기억하여, 시인의 시세계를‘목가시’니‘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안에 유폐시켜 놓았다. 그렇지만 그 꿈의 속삭임조차도 일상의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을‘먼 나라’에 설정한 아이러니이어서‘그 먼 나라’가 부재하는 현실을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석정시인은 한시에도 능했다. 그의 조부, 부친과 맏형인 신석갑辛錫鉀(1904-1975)이 한학과 한시에 조예가 깊었듯이 석정 또한 한시漢詩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다. 자연히 한시도 번역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한시 번역서가 없을 때 석정이 번역한 한시는 교과서다운 역할을 당당했다. 또 향리 출신인 이매창李梅窓의 시를 번역하여 지방의 기생 시인으로 자칫 묻혀버릴 그녀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로 부각시켰다.

시인은 때로는 논설과 수필로 자신과 이웃과 국가와 자연이 가지는 당위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이성과 감성을 통하여 여과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기와 기행, 그리고 편지와 전기 등 다양한 장르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노출시켜 사회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습작 투고기에 소설을 쓰기도 했다. 시인은 시론을 직접 집필하여 이를 대학에서 강의하고 이에 입각하여 각종 현상모집에서 시작품을 심사하고, 이러한 시론으로 많은 후학들의 시집이나 저서에 서문을 얹어 그들을 지도 편달하고 고무시켰다. 또 문예지의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시인들을 문단에 등용시켰다.      <신이영 : 32世 / 일옹공파 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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